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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와선별부 타산지옥편 100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100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지하궁전의 통로는 나와서 머문 녹주에는 말이나 낙타가 많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거액을 주어도 모든 말과 낙타를 살 수는 없다. 일행은 녹주의 주민을 힘으로 위협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바가지에 가까운 돈을 주고 말 두 마리를 샀고, 그것을 아무도 타지 않고 짐말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고풍무도 자기 돈을 주고 말을 하나 사서 따로 떠났기 때문에 그들이 그곳에서 구입한 말은 세 마리인 셈이다.


돌이켜보면 옥로전장을 떠날 때 데리고 온 말과 낙타는 지하궁전으로 통하는 수로 입구에서 돌려보낸 것을 제외하면 살아남은 것이 없다.


남은 일행도 고풍무까지 떠나고 나니 더욱 단출해져서 일꾼이라 불렸던 일행 중에 용미, 현기, 훈석, 나착, 과선, 계필의 6인과 타기곡, 여산민, 초양서, 곽윤아에다 죽은 용부단주가 거느렸던 무사 중 살아남은 무사를 합하여 총 10여 명의 인원이 옥로전장을 향한 귀환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나흘째에 접어들었을 때 앞장 서거 걷고 있던, 타기곡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앞에서 말 두 마리가 접근하고 있다. 지금 방향대로 직진한다면 우리와 마주치지 않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이곳은 모래 언덕이 좀 있지만 비교적 시야가 트여있고, 이 지역 사람들은 시력이 나쁜 사람이 드무니 반드시 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나착이 말했다.

두 필의 말에 두 사람이 타고 온다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만약 거대 세력의 정찰병이라면 어디 소속인지 보고 결정하시면 될 듯합니다만...”


답한 것은 타기곡이 아니라 여산민이었다.

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만, 우리 인원이 줄었기에 별도의 정찰병을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기감이 좋은 제 의형이 계시니 그럴 필요도 적었고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숨고 훈석만을 내보내 정찰을 할지 말지 고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타기곡이 그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다. 저쪽에서 방향을 틀었다. 우리를 감지한 모양이다. 일반적인 몽고인보다 시력이 좋으니 무림인 그것도 고수에 속하는 자다. 우리가 열 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오고 있으니 실력에 자신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단순한 정찰병은 아니란 뜻이다.”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상대방이 확실히 보이기를 기다리는데 곧 모래 언덕을 넘어 상대방의 형체를 볼 수 있었다.


접근하는 두 사람은 그들을 보자 더욱 박차를 가해 빠른 속력으로 접근했다. 여산민이 그 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어디서 본 사람들인데...”


그때 여산민보다 시력은 약해도 다가오는 사람을 본 일은 훨씬 많은 일행 중의 무사 하나가 소리쳤다.

, 염염공입니다. 약간 달라진 것 같기도 한데 체형이나 인상은 맞습니다. 머리와 수염의 빛도 달라져 보입니다만 그래도 염염공 맞습니다.”


그 말을 듣자 타기곡과 여산민도 오래전에 객잔에서 그들을 본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들이 옥로전장의 사람이라는 사실도 기억했다.


염염공이 그들에게 접근하여 말에서 내려서 말을 끌고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인사를 했다. 타기곡와 여산민을 비롯하여 현기와 용미 등 그들과 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람들이 인사를 간단히 나눈 뒤 여산민이 말했다.

두 분을 이 외진 곳에서 만난 일이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청해검만 따라 오시고 다른 아우분들은 안 보이시는군요...”


여산민이 말을 흐린 부분에서 궁금한 일은 염염공이 대신 대답하였다.

강남으로 내려간 일이 잘 안 되어 아우 두 사람은 죽었습니다.”


저런...”


여산민이 그렇게 말하고 그에 대해 위로의 말을 하자 염염공은 그 말에 대해 간단히 답례하고 자신의 말을 급히 이었다.

제 아우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들었습니다. 저희가 우연히 적의 매를 붙잡아서 그 밀서를 해독하여 사철풍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염염공이 그 말에 전혀 기쁜 구석이 없이 이렇게 말했다.

그건 사실입니다만, 호사다마라고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옥로전장이 망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염염공은 보통 이럴 때 쓰는 큰 화를 입었습니다라는 표현도 아니고 아예 망했다는 말을 썼다.


누구랄 것이 없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옥로전장이 망하다니요.”


염염공도 말을 하다 보니 처연해졌는지 표정이 안 좋아지면서 이렇게 말했다.

팔병비가 옥로전장을 공격하였습니다. 팔병비 수장의 연합 공격은 노장주님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다른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리고 팔병비의 다른 부하들도 대단하니 옥로전장이 결국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래도 엄연히 성내에 있는 대장원아닙니까? 그걸 병력으로 휘몰아쳐 공격하는데 서하국에서는 보고만 있었다는 말입니까?”


병력을 동원해서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장원을 공격한 것은 팔병비의 정예 100명 정도와 어디서 고용했다는 낭인들이었습니다. 나는 그 낭인이 실은 그냥 낭인이 아니라 다른 세력이 은밀히 보낸 병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여튼 주력은 그래도 팔병비였습니다. 아무리 도심 한가운데라고 하더라도 100명 정도면 그리고 하루 정도는 눈감아 줄 명분이 서하국 관부에게도 있습니다.”


서하국 조정이 옥로전장에게서 얻어먹은 것이 얼마인데 등을 돌렸단 말입니까?”


노장주께서 한족이기 때문에 생애 내내 그 문제를 거론하는 자들이 서하 조정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장주의 무공이 북방에서는 당할 사람이 없고, 재력이 대단하니 참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도 들어오니 더욱 가만히 있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그간 쌓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불만이 서하국 조정만의 것이었다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여산민이 짐작이 간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오면서 청해의 기주들이 옥로전장에 반기를 들고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그 사람들 단순히 돈 때문에 그리고 누군가의 사주가 있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옥로전장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정서적인 불만심리도 상당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계속 청해를 지키고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돌아와 보니 기주들만 아니라 일반 어민 중에도 불만을 지니고 전장에서 독립하려는 기운이 상당했습니다. 무력으로 그들을 누르기가 마땅치 않고, 전장의 위기도 심각한 듯하여 그들을 내버려 두고 저희 두 사람은 북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분명히 누군가가 부추겼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옥로전장의 휘하 세력의 상당수가 그간의 전장 지배에 반감을 지니고 있다가 기회가 오자 다른 마음을 품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을 돕고 전장의 힘이 약해지고 노장주가 쓰러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뒤에서 방조한 자들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 처지에서야 그런 사실을 알건 모르건 그간의 불만을 표출할 기회가 왔으니 행동한 것뿐입니다. 더구나 팔병비가 나타나서 옥로전장에 관련된 상단이나 표국이라면 모두 두들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옥로전장의 지배에 만족하고 있던 하부 세력도 등을 돌리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심지어 초원과 대막의 여러 부족들도 비슷합니다. 옥로전장이 팔병비에게서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면 팔병비의 적이 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산민이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주변 정리를 하고 나서 서하국 관부가 모른 척해줄 수 있는 기백 명의 병력으로 하루 사이에 옥로전장을 들이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백 명 정도의 무장병력이 성내에 흩어져 있으면 대단해 보이지 않지요. 그러다가 정한 때에 모여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무사 중 하나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보통은 신분의 차이를 고려해서 이런 대화에 끼지 않는 무사인데 이렇게 나서는 것을 보니 장원에 두고 온 가족의 생사를 염려해 참다 참다 말을 꺼낸 모양이었다.

노장주는 돌아가시고, 현임 장주도 돌아가셨네. 호원무사들이 절반 이상 죽자 장주님의 큰아들 그러니까 노장주님의 손자분이 나서서 항복하겠다고 했고, 팔병비도 다 죽일 생각은 없던 모양인지. 모든 재산과 권리를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살아남은 식솔들과 남은 무사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셨네. 팔병비는 그 안전을 보장하고 집 안에 있는 재물 상당수는 가져가도록 허락해주었지만, 이제 서하국의 밑바닥 무력과 재력의 주인은 팔병비가 되었지.”


여기서 고개를 돌려 질문 한 무사를 돌아보며 염염공이 말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팔병비가 싸우지 못하는 부녀자와 아이들을 건드리지는 않았으니까. 그 장원을 팔병비가 차지했는데 거기서 계속 일하겠다고 한 하인들은 후하게 대우한다고 하더군. 팔병비가 뱉은 말에 허언하는 자들은 아니니 아마 별일 없을 것이네. 그리고 많은 하인과 그 가족들은 장주님의 남은 식구들과 함께 중원으로 향했네. 그리고 나는 노장주님의 부탁으로 이 소식을 전하러 그대들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오늘 만난 것이고.”


노장주님은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내가 말을 잘못했군. 돌아가시기는 했는데 습격이 있던 날 돌아가신 것은 아니네. 현임 장주이신 아드님이 돌아가신 소식을 병석에서 듣고 부축을 받고 나오셔서 손자를 불러 항복의 뜻을 전달하게 하신 것은 노장주님이네. 그날 이후로 이틀을 더 살아계셨고 덕분에 나도 임종을 지킬 수 있었지. 움직일 수 없는 몸을 억지로 공력을 운용하여 움직이시다가 결국 돌아가셨네. 물론 작정하고 결심하고 하신 일이네만. 뒤늦게 도착한 우리 두 사람을 보시고, 내 형제들이 둘이나 죽은 것도 아셨으니 그것도 심적 타격이 있었다고 생각하네. 아무튼, 그 와중에도 멀리 떠난 자네들을 기억하고 당부의 말씀을 하셨네.”


호원무사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고수급이 앞장서다가 모두 팔병비에게 당했을 텐데 두 분이 노장주님의 유족을 중원까지 호위하는 편이 좋았을 텐데요. 팔병비가 차지한 옥로전장의 토지와 재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여도 장주님의 유족이 챙겨서 떠난 재물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 재물을 노리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는데...”


나도 그 점을 염려했지만, 노장주님이 완강하게 말씀하셨네. 중원에 가서도 그 정도 인원이 넉넉히 살 정도의 재물이니 부담도 되지만 남은 호원무사들도 있고, 돌아가신 현임 장주님의 아우분들도 노장주님의 무공을 이어서 괜찮은 고수이니 중원까지 별 탈은 없으리라고 생각하네. 그래도 불안하긴 해서 서하국 왕도에 있는 표국에 연락하여 중원까지 보표를 부탁해두었네. 상당한 재물이 들긴 하지만, 돈을 아끼려다 그 돈을 노린 자들에게 위해를 당하느니 그편이 낫다고 유족분들도 동의하셔서 최대한 뒤를 봐 드리고 노장주님의 유지를 이으려 출발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식이라면 늦든 빠르든 저희도 결국은 듣게 되었을 텐데, 두 분을 여기까지 그냥 보내시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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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딱 100편에서 끝내지는 못하네요. 

항상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허안 배상



독자분들에게 질문이 있습니다. 제 원고에는 <강상녹림반시군>편이 48편에서 그치고 타산지옥편으로 넘어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 게시판을 확인할 수 없어서 이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내용은 몰라도 편수를 기억하는 분이 안 계시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냥 확인차 물어봅니다. 나중에 올릴 때 적당히 앞 부분부터 연재하면 중복으로 올리는 부분도 있어도 건너뛰는 부분은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참고삼아 이렇게 글을 올려둡니다.

 


[연재] 와선별부 타산지옥편 99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99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안내를 받은 장소에 가서 벽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방이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이 넉넉하게 설 수 있는 방이었는데, 사방의 벽에 손잡이가 둘러 있고, 중간중간에도 지팡이를 세워놓은 듯한 손잡이가 여럿 있었다.


그것을 꽉 잡으라는 말을 듣고 제해천에 속한 사람이 뭔가를 건드리자 방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감각으로 보아 방 전체가 위로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일종의 승강기였는데 이렇게 방 전체를 올려보내는 일에 쓰는 것이 엄청난 무게의 바위가 연결된 끈이 있고 그 바위가 낙하하는 힘으로 반대쪽에 있는 방이 통으로 위로 올라가는 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음번에 쓰려면 엄청난 준비가 필요했다. 떨어뜨린 바위를 다시 올리든 어디서 그런 바위를 하나 더 가져와야 했다. 한 번만 쓸 수 있는 승강기인 셈인데 아마도 이런 것이 몇 개는 더 있을 테니 앞으로도 몇 번은 올라가는 일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그 위치와 사용법을 알 때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가장 높은 곳에 가서 멈출 때는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미리 그럴 것이라고 알림을 받았고, 모두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라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방 자체도 그런 일에 대비를 해서 단단히 만든 방이었다.


들어왔던 문을 열고 나가니 3장 정도의 넓이를 지닌 계단이 보였다. 여기도 빛은 전혀 없었는데 횃불과 야명주가 있어서 문제는 없었다.


말은 계단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일종의 경사로였다. 계단식으로 되어 있기는 했으나 보통의 계단처럼 발을 딛는 곳이 편편하지 않고 경사져 있었다. 따라서 올라가면서 주의하지 않는다면 미끄러지게 되어 있었다.


용미가 그 구조를 보고 말했다.

올라갈 때는 그나마 괜찮은데 내려오는 상황이라면 엄청나게 위험한 계단입니다.”


계단의 한단한단의 밟는 면이 경사져 있었으므로 내려오는 상황에서는 주의하지 않으면 미끄러지기 쉬웠다. 그리고 계단의 구조가 일종의 거대한 나선 구조인데 올라가면서 일정 구간마다 꺾이는 구조였다.


그런 구조는 반대로 내려올 때 미끄러지고, 멈추지 못하면 몇 담만 미끄러지면 아래 계단으로 구르는 것이 아니라 절벽으로 떨어지게 되는 구조였다.


올라가는 처지에서는 그냥 꺾어 올라가는 것이지만, 내려오는 처지에서는 미끄러질 경우 제때 멈추지 못하면 그 꺾이는 부분이 절벽이 되어 그대로 아래로 추락사하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에서는 올라가는 사람도 주의하지 않아 만약 미끄러진다면 같은 꼴을 당하기 쉬웠다.


다만 올라갈 때도 사람을 붙잡는 중력이지만, 내려올 때는 원치 않는 가속도를 더해서 침입자를 자연스러운 위험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계단의 길이가 상당하고 올라갈 거리가 만만치 않기에 장시간 내려오다 보면 일반인은 물론이고 무인도 장담하기 어려운, 평범하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게 위험한 구조였다.


다행히 그들은 이제 올라가는 길이고, 모두 무공이 있어서 다른 기관진식이 없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고풍무는 저들이 도중에 공격할까 봐 자신들의 뒤를 일정 거리를 두고 따라오도록 했다. 그리고 길 안내를 할 사람 두 명만 앞에 세웠다. 가장 뒤에는 암기에 능한 여산민을 배치하여 행여라도 저들이 허튼짓하면 암기를 사용하도록 당부하였다.

높은 하늘을 날던 팔병비의 연에도 닿을 정도로 강한 암기를 구사하는 여산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손을 쓴다면 그 위력은 불문가지였다.


도중에 북야왕이 침입자를 대비한 시설이 없지 않았으나, 안내를 맡은 제해천의 사람이 아는 바를 넘어서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중간에 밥을 세 끼나 먹은 끝에야 그 힘든 경사로를 완등하여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지상으로 올라오는 문도 만만치 않은 함정을 품고 있어서 여는 방법을 모른다면 큰일이었지만, 아는 상태에서는 어렵지 않았다.

올라온 곳은 어떤 녹주(綠洲 :오아시스)가 아스라이 보이는 곳이었다. 일행이 다 나오자 안내인은 멀리 떨어지도록 했는데 일각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올라온 곳에 유사가 생기면서 그들이 열고 나온 입구가 아래로 침강하였고, 계속 아래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모래는 계속 유사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유사가 진정되었을 때는 꽤 깊은 모래 계곡 비슷한 것이 생겼지만, 사막에서 이 정도의 모래 언덕 사이에 움푹 들어간 곳은 드물지 않아서 나중에 다시 오면 어디가 어딘지 알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고풍무와 타기곡은 일단 멀리 보이는 녹주로 가려고 하였는데 제해천과 백수당은 같이 갈 마음이 없는지 그 녹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고풍무는 그들이 어딘가 미리 약속한 장소에서 수토를 만나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굳이 그 뒤를 미행할 마음이 없었다.

경계심을 지니고 접근한 녹주는 다행히 완전히 평범한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짐을 풀고 물과 식량을 보충하면서 일행은 다음 진로를 논의하였다.


먼저 타기곡이 곽윤아에게 물었다.


곽윤아는 아버지에게는 소식을 전하면 된다고 하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수련을 하기 위해서 고향 마을을 떠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더구나 마을의 안전은 자신이 혈기창을 지녔음을 팔병비에게 확인시키는 일이 먼저인데 팔병비가 고향 마을로 진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팔병비를 찾아내어 혈기창을 보여주고, 이후에도 일행을 따라 수련과 경험을 더 쌓겠다는 뜻을 밝혔다.


소위 일꾼들과 남은 옥로전장의 무사들은 일단은 옥로전장으로 복귀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행로는 정해져 있었다. 다만 일꾼들은 북야왕의 궁전에 다녀왔기에 일단 계약 내용이 완수된 지라 정산을 받은 후 거취는 그들의 자유라는 점은 차이가 있었다.


타기곡과 여산민은 예의나 그런 유형의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옥로전장에 갈 일은 없었다. 타기곡은 여기서 남하를 하되 그 경로를 촉한 땅으로 잡아서 성도나 그 부근 어딘가에 있을 둘째 형인 권평서와 안혜빈을 찾아가고 싶어 했다.


대형 한내역이 그쪽 방면의 문제를 해결했으니 권평서가 맡은 일을 돕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정호의 자객도에서 서로 흩어질 때 누군가 임무를 달성하면 모일 장소와 할 일이 정해져 있었지만, 확고한 지침이 있지는 않았다.


만약 사철풍이 죽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다면, 어디를 갈지 고민하거나 둘이 흩어져서 가는 것도 고려했을 텐데 그쪽 문제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면, 권평서에게 가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주공인 서인초나 강인혜를 도우러 가는 길도 있지만, 그들이 받은 명령에 의하면, 의형제들이 각각 맡은 임무를 서로 도와 해결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은 논외였다.


따라서 문제는 남하 경로에서 옥로전장을 거칠 것이냐 말 것이냐 정도만 결정하면 되었다.


그리고 고풍무의 차례가 되었고, 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서 따로 길을 잡도록 하겠네. 어찌 되었거나 의뢰는 완료된 듯하고, 돈은 이미 선금으로 받았으니 나도 옥로전장에 굳이 갈 일이 없네. 그러니 내가 할 일을 하러 따로 움직일 생각이네. 자네들과는 의뢰 관계를 넘어 깊은 정이 있지만, 지금은 나도 내 길을 가야 할 시간인 것 같네. 몸져누우신 옥로전장주님의 얼굴도 한번 봐야 할 듯도 하네만 그래도 지금은 내가 원하는 일을 속히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네. 그건 촉땅으로 가고 싶은 자네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일 테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말에 딱히 반대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을 녹주에서 쉬어 보낸 다음 날 일행은 고풍무와 작별인사를 하였다. 타기곡과 여산민은 고풍무도 없는 일꾼과 무사들의 안위를 염려하여 결국 옥로전장을 거쳤다가 남하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이 고풍무라는 정든 한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을 4일 뒤에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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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면 타산지옥편이 다음 편에서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의도치는 않았으나 딱 100편이 됩니다.

각 편의 분량이 들쭉날쭉이라 별 의미는 없고, 또 막상 써보면 한 두편 더 남을 수도 있어서 어찌 될지 모르지만, 예상하건대 11월에는 일단 이 연재편은 완료될 것 같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허안 배상




[연재] 와선별부 타산지옥편 98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98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타기곡과 고풍무가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 깊은 지하에 갑자기 다른 사람이 생길 리 없으니 다가온 사람들은 나려타검을 선두에 세운 백수당과 제해천의 사람들이었다.


나려타검의 표정으로 보아 그가 이변이 발생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든 고풍무가 물었다.

혹시 수토가 원래 그쪽 사람이었나?”


나려타검이 간단하게 그 말에 긍정하였다.

이름이 수토(壽兎)였잖습니까?”


그 말에 고풍무가 당했다는 듯한 과장된 몸짓을 보이면서 말했다.

원래 백수당의 토끼였다...”


이름만 보면 장수하는 수명에 길하다는 이름으로 달나라 토끼를 은유해 지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토끼는 토끼고 백수당에 속한 토끼가 맞습니다. 다만 내가의 무공을 익힌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 그래서 너무 방심했어. 의술이 깊으니 자연히 독술이 깊을 테지만, 그건 우리에게 더 뛰어난 사람이 있으니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했지. 아 물론 수토를 의심해서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네. 그저 우리 일행이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 정도는 그런 검토를 해보는 일이 당연히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정작 모든 사람에게 그런 검토를 해보는 일을 항상 습관적으로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검토를 하고 말았던 게야. 그래서 무공을 모르는 것이 확실하고, 또 옥로전장 노장주의 안목이 살폈을 테니 괜찮을 것이라고 지나치게 믿었던 게지.”


이름만 보고 사람을 의심할 분은 아니시죠. 죽검객님도...”


그래 태도에서든 무엇에서든 아무런 기미도 징조도 없었지. 대단한 절제력과 인내심이야. 실제로도 무공이 없었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천시와 지리가 맞았을 때 침술만으로 간단하게 일을 성공시키고 도망치다니 솔직히 그런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말이 쉽지. 무공에 자신이 없는 사람이 들키면 자신을 지킬 방법도 수습할 방법도 없는 데 오랜 시간 굳건한 심리 상태를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지. 아무튼, 결국 자네들도 믿는 구석이 있었네. 그려.”


그렇습니다.”


나려타검이 대답하자 고풍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비밀 통로와 문이 더 있나?”


, 있습니다. 다만 수토가 나간 문은 아마 뒤에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도록 해놨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수토가 추적자를 감당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북야왕의 지하궁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

제해천에 자세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해명신군께서 북야왕을 격파하던 시절에 이곳을 다녀가셨고, 당시 있던 사람들이 기록을 자세히 남겼습니다. 심지어 거의 그 시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예면옹이 아직 살아계시는데 이 분이 50년 정도 전에 한 번 내려왔다 가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쉬운 길이 아닌 길로 온 것은 우리를 유인할 셈이었나?”


아닙니다. 여기서 나가는 길은 들어올 때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과거 북야왕 시절을 생각하면 자기 거처에서 나갈 때 빠르게 지상으로 나갈 길을 만들어 두는 일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그 길로 누군가 빠르게 침입해 오는 일은 원하지 않을 테니 그 길들은 여기서 올라갈 때는 쉽게 오르지만, 반대쪽에서 들어오려면 절차가 복잡합니다. 더구나 북야왕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들어올 길 자체가 막혔다고 합니다. 해명신군께서 굳이 복원하지 않으신 탓이라 합니다. 하지만 나갈 때는 이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 개가 있다고 하더군요. 다만 모든 통로가 지금도 이용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토가 무사히 나갔다면 다른 곳도 잘 이용할 수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 정보를 이렇게 쉽게 말하는 이유가 있겠지?”


고풍무의 질문에 나려타검이 간명하게 대답하였다.

살고 싶어서입니다. 저희가 길을 알려드릴 테니 저희도 무사히 나가게 해주십시오. 아울러 나가서도 서로 자기 길을 가고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너희를 다 죽이고, 온 길로 되짚어갈 수도 있는데...”


죽검객님이나 저기 타기곡과 여산민 두 분이 워낙 대단해서 결국 저희가 전멸하리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 분 말고 싸움

이 끝난 후 확실히 산다고 장담할 수 있는 분이 몇이나 됩니까? 그 점을 죽검객께서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수토가 물건을 가로채 갔으니 너희는 너희 목적을 달성했다 이것이군.”


짐작이지만, 옥로전장 말고 다른 분들은 여기 온 목적을 이루셨다고 생각합니다만..”


고풍무는 여러 사람의 얼굴을 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반대할 사람은 남아있는 용부단주 휘하의 무사들 정도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지 이 일행의 지휘권이 고풍무에게 있다는 처음 출발할 때 고지된 사실을 명심하고 있어서인지 의견을 내지 않았다.


고풍무는 여기서 싸움을 벌이면, 남은 일꾼 상당수를 지키면서 싸우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런 싸움을 할 각오는 이 일을 시작할 때부터 항상 있었지만, 지금 목적을 다 이루고 귀환만 하면 되는 상태에서는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고풍무는 전음으로 몇 사람과 대화를 조금 더 나누고 결국 나려타검의 제안을 승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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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짧아 죄송합니다. 적절하게 끊을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허안 배상

 


[연재] 와선별부 타산지옥편 97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97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여산민이 몸을 굽혀 그 땅에 떨어진 물체를 살펴보더니 이윽고 들어 올렸다. 나착이 옆에 붙어서 말했다.

영리하게 나뭇잎을 숲에 숨기자는 생각이었군요. 이 물건의 주인은 재물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니 재물 가져가는데 눈이 어두워진 자들이 정말 중요한 것은 놓치기 쉽도록 수를 써놓은 셈입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군요. 여대협께서는 짐작하시는 바가 있습니까?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돌덩이인데요.”


여산민이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관찰하는데 용부단주가 상자를 놓아두고 다가와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본장이 찾던 물건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떠나기 전에 들은 말이 있습니다. 환인공의 신표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아 보이는 그냥 암석 덩어리 같을 테지만, 일반적인 돌과는 다른 뭔가가 있을 테니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장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것이 그것 같습니다.”


여산민이 용부단주에게 물건을 건네며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굳이 짐작을 해보자면 이것은 심장(心臟)입니다.”


심장이요?”


누군가의 반문하는 목소리가 가장 컸지만, 질문의 내용은 소리 내어 입밖에 안 냈어도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공통으로 있었다.

많은 사람의 궁금해하는 눈길을 의식하면서 여산민의 설명이 이어졌다.

환인공의 물건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 물건 자체의 재질이나 모양으로 미루어보아 이것은 심장입니다. 아니라면 심장 모양으로 만든 특이한 암석을 깎아 만든 조각품입니다.”


대부분은 사람의 심장을 정확히 본 적이 없으니 여산민의 말에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나착이 말했다.

그 말씀은 여산민 대협께서는 이것이 그런 모양으로 만든 돌조각품이 아니라 진짜 심장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석화된 심장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심장이 돌로 변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가 질문했는데 여산민이 고개를 저으며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의 심장이 돌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심장이 아니면 동물의...”

나착이 말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점이 있었는지 나오던 말을 멈췄다. 여산민이 긍정의 표시를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람이 아니라 흡혈귀의 심장이었고, 무슨 이유로 인해서 석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전설에 보면 몇몇 인간이 아닌 요괴가 태양빛을 보면 불에 타거나 혹은 돌이 되어 굳어버리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마 그런 전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어떤 이유로 돌로 변한 흡혈귀의 심장이었고, 이 석화된 흡혈귀의 심장은 역시 흡혈귀인 환인공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었기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신물로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요?”

누군가의 지적이었다. 일견 타당한 지적이었다. 북야의 삼공과 사위의 신물은 때로는 타인에게 맡겨져서 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한다는 신분증의 역할을 해야 했다. 너무 귀한 물건이라면 특별히 그 주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아무리 신뢰한다고 하여도 타인에게 맡겨 멀리 보낼 가능성이 있는데 신표로 삼기에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질문자는 이런 점을 지적한 것인데 그 답은 간단하게 곽윤아에게서 나왔다.


바로 그래서 이것이 신물이 맞습니다. 북야왕께서는 그 수하들의 신물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물건들로 정하도록 하셨습니다. 북야왕 당신의 보물들도 그냥 북야왕께서 지니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귀한 보물이었습니다. 오늘 발견한 장신구나 다른 왕비의 신물이었던 귀걸이도 그 안에 심오한 무학의 이치를 담고 있는 물건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환인공도 북야왕의 아랫사람에 불과하니 정말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담지 않은 물건을 신물로 삼을 수 없었을 겁니다.”


곽소저의 말이 옳겠지만, 저 돌덩이 심장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더는 세상에 있지 않을 것 같으니 이제는 팔병비에 대한 신물 이상의 역할은 못 하겠군. 어쨌거나 우리 일행은 모두 각자 원하던 것을 얻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말이 오가고 찾아보지 못한 내부의 시설이나 장소를 살펴서 더는 대단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찾기로 하였다. 나려타검과 제해천의 사람들이 시간 약속을 어기고 가까이 오는 기척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까지 다른 위험이나 함정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일행은 두세 무리로 흩어져 남은 공간을 탐색했다.


이곳은 북야왕 시절의 생활공간이었으므로 환인공이 혼자 되고 나서 특별히 조치하지 않았다면 그런 함정이 있을 이유가 없기도 했다.


제해천과 백수당의 무리와 약속한 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살피며 훑어보고 지나다녔지만, 더는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풍무는 사람을 모으려 막 소리를 내려 하는데 느닷없이 심상치 않은 고함을 들었다.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소리가 발생한 장소로 달려갔다. 고풍무가 당도하니 용부단주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그의 부하 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용부단주의 다른 부하들은 매우 황당한 일을 당한 사람 특유의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고풍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제야 표정을 수습하고 손가락으로 한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토가 갑자기 부단주님과 동료를 공격하고 저곳으로 사라졌습니다. 환인공의 신물도 같이 가져갔습니다.”


그때 여산민 등도 도착하였고 바로 물었다.

수토가 용부단주를 공격하는 것을 보았는가?”


아닙니다. 저희는 이곳에 있었지만, 부단주님과는 몇 걸음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돌아봤을 때는 부단주님이 이미 쓰러졌고, 동료도 그 옆에 쓰러지는 중이었습니다. 수토는 부단주님에게서 신물을 빼내더니 바로 몸을 일으켜 저 벽으로 사라졌습니다. 저희가 고함을 지를 때는 이미 벽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고, 제가 벽 앞에 섰을 때는 이미 지금처럼 열렸던 문이 사라지고 지금처럼 벽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저 벽이 문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겁니다. 그러느라 고함을 쳤는데 죽검객님이 곧 오셨습니다.”


용미가 도착하여 문제의 그 벽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비밀문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안에 제어장치가 있는지 이미 이쪽에서는 열 수 없도록 조치를 했습니다.”


용부단주와 옥로전장의 무사를 살핀 다른 사람이 두 사람이 확실히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여산민이 나서서 더 자세히 살피더니 용부단주와 죽은 무사의 목덜미에서 미세한 침을 뽑아내었다.


여산민이 그 침에 대해 말했다.

수토가 배신할 줄은 몰랐습니다. 옥로전장이 고르고 고른 사람일 텐데 말입니다.”


고풍무도 수긍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무공을 익히지 않아서 어느 정도 방심한 것 같군.”


물론 이미 말했듯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칼 따위의 무기를 휘둘러 사막과 초원의 도적과 마적에게서 자기 몸을 지킬 정도의 실력은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의원이었던 수토고 마찬가지다.


고풍무가 의미한 바는 수토가 그 이상의 무공이 없고, 숨긴 것도 없으며 내공 따위는 전혀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여산민이 말을 이었다.

내공은 전혀 없을지라도 오랜 세월 의원 생활을 했으니 침술은 도통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침을 놓는 일은 무척 빠르고 정확할 것도 그만한 실력의 의생이니 당연하고요. 그런 침술로 누구와 싸울 수는 없지만, 완전히 방심한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다가 목덜미에 정확한 혈도에 독침을 빠르게 연달아 꽂는 일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무공이 없으니 처음부터 이곳에 이런 시설이 있는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고수들과 떨어질 때와 이 장소에 와서도 다른 부하 무사들과 필요한 거리를 확보할 때까지 오랜 세월 기다렸다가 실행에 옮겼다고 봐야 합니다. 인내심이 대단합니다. 무공을 몰라도 그 뛰어난 의술과 일을 성공시키기 위한 집중력과 의지가 남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다만 지금 궁금한 일은 한 가지입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이런 짓을 했느냐지....”


일행 중에 고수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어떤 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렸고, 그중의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 질문에 답할 사람들이 지금 여기로 오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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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허안 배상


[연재] 와선별부 타산지옥 96편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96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사건은 곽윤아가 혈기창(血驥槍)을 얻은 다음에 일어났다.


어느 한방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데 불이 모두 꺼졌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여산민이 가장 먼저 이유를 알아채고 말했다.

안에 공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불이 꺼진 겁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심지어 문을 열고 있는데도 안과 밖의 공기가 섞이지 않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물었다.

안에 공기가 없다고?”


물론 정확하게 말하면 공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잘 설명하기 어려운데 공기에는 우리가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어떤 생명에 필수적인 원기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공기는 그것을 결여하고 있기도 합니다. 완전히 밀폐된 장소에 오래 있으면 질식해서 죽는 이유가 그것인데 사실 그 상황에서도 숨을 쉬어보면 뭔가 기체로 호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밀폐된 공간에서는 그 생명의 원기가 되는 것이 모두 소진되고 없는 죽은 공기만 남게 되기 때문에 죽게 됩니다. 이 방의 상태가 그렇습니다. 안에 공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있지만, 죽은 공기라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이 방이 환인공을 위한 방이나 창고가 아닐까 합니다. 환인공은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몸이었으니까요.”


용부단주가 그 말에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우리 옥로전장은 북야삼공이나 사위의 신물이 필요한데 과거 북야쌍비(北野雙妃) 가운데 좌비(左妃)의 물건은 이미 본장에서 주었고, 이제 우비의 노리개도 타기곡 대협과 그 의제에게 들어갔소. 혈기창은 곽소저가 챙겼고, 다른 삼위의 물건이 남아 있을 수 있지만, 아닐 수도 있소. 삼공 가운데 다른 둘 중 하나는 팔병비와 이미 동행한 모양이니 이곳이 환인공의 거처나 비고(祕庫)이고 안에 환인공의 신물이 있다면 그건 우리가 취하겠소.”


모두가 동의하는 가운데 용부단주가 고개를 돌려 계필을 보면서 말했다.

물론 자네와 연관된 물건이 있다면 본장은 약속을 지킬 것일세. 자네도 그 신물을 지니고 본장과 협력한다는 약속을 지키리라 내가 믿듯이 자네도 믿어주면 되네.”

계필은 말과 표정으로 그 말에 동의하였다. 용부단주가 다른 횃불을 안으로 넣어 살피려 하는데 방 입구를 조금 넘자 얼마 안 가서 꺼졌다.


여산민이 말했다.

죽은 공기 속에서는 불도 타지 않습니다. 야명주를 사용하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고풍무를 보았다. 고풍무는 어디선가 구슬을 하나 꺼내주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의아해하는데 여산민이 대표로 물었다.

야명주가 하나 더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지하로 내려와서 받은 큰 야명주 말고 원래 야명주를 지니고 있었군요.” 여산민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하기사 지하에 내려와서 그런 큰 야명주를 받는다는 확실한 보장이 없다면, 아무 준비도 안 할 분이 아니시긴 하죠.”


고풍무가 대답했다.

분명히 그 야명주를 받을 때 내가 본 것은 그보다는 훨씬 작았다는 이야기를 했지. 하지만 아무도 그걸 내가 구입 했는지 아직도 지니고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지.”


흡혈귀가 태양 빛에 약하고 그것을 대신할 수단이 야명주라는 사실을 아는데 야명주를 준비해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용부단주는 뒤에서 그런 말을 나누거나 말거나 숨을 참은 채 야명주에 내공을 불어넣고 앞으로 나갔다.


수색 끝에 척 봐도 귀중한 상자를 하나 비밀 벽 뒤에서 찾아냈고, 그것을 방 밖으로 운반해 나왔다.


밖에 나와서 참았던 숨을 크게 쉬는 사이 고풍무가 환인공에게 받은 열쇠를 건넸다. 용부단주가 그중에 이 상자와 가장 맞을 것 같은 열쇠를 골라 상자를 열었다.


다른 함정이 있을까 봐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용부단주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열었지만, 함정은 없었거나 제대로 된 열쇠로 열 때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상자의 크기가 컸는데 그 안은 귀중품이 꽉 차 있었다. 용부단주가 쉽게 들고나와서 몰랐는데 용부단주 같은 고수가 아니었으면,

는 일도 쉽지 않은 무게라고 생각되었다.


용부단주는 숨을 참은 상태에서 한편으로 야명주에 내공을 사용하면서 했으니 역시 옥로전장이 가려 뽑아 보낸 고수답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귀중품이 가득 차 있었지만, 용부단주의 얼굴은 조금도 기쁜 표정이 없었다.


분명 상자 안에는 금덩이와 보석이 가득 차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으며 각기 자루별로 담겨 있기까지 했다.

, 금괴는 10개씩 한 자루에 담겨 있었고, 보석은 색깔과 종류별로 비단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다른 보물들도 그렇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볼품없는 것은 상자로 무겁고 단단하고 튼튼하고 적합한 방법이 아니면 열리지 않도록 매우 잘 만들어진 금속제 상자이긴 했지만, 그런 실용성을 제외하면 장식이나 소재가 평범한 것이어서 돈이 될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상자의 두꺼운 금속 벽에 칼날과 독침이 들어있는 것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보였다. 테두리에 날카로운 바늘과 칼날이 상자의 내벽와 외벽 사이에 틈을 만든 공간에 배치되어 있었고, 열쇠가 아닌 것으로 열 때 어떤 방식으로든 작동하리라 예상되었다.


열쇠를 사용하여 열더라도 부주의하여 가장자리를 잘못 만지기라도 한다면 찔리거나 베이기 쉬웠다. 물론 환인공은 부주의하여 자기 상자를 자기가 열다가 테두리를 잘못 만지거나 닿아도 그런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해를 입지 않으니 문제없었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달랐다.


아무튼, 용부단주 처지에서는 이런 재물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굳이 용미가 나서지 않더라도 상자에 담긴 물건들이 돈으로는 가치가 높지만, 돈으로서의 가치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그 상자의 내용물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곽윤아와 초양서를 제외하면 인생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고, 초양서도 부유하게 생활하고 여러 보물을 본 경험이 많으므로 그도 그 사실을 짐작하고 용부단주의 표정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용부단주가 비단 주머니에 담긴 보석이며 금괴 묶음이며 하나하나 꺼내어 바닥이 드러나 상자가 비도록 했으나 다른 것은 없었다.

용부단주가 바닥의 둔 상자에서 물건을 꺼내기 위해 이제까지 몸을 굽히고 있다가 결국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상대는 소위 일꾼이라는 사람들이었다.

재물은 자네들이 원하면 골고루 나눠 갖도록 하게.”


여산민이 나서서 말했다.

아직 모든 방과 창고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실망하긴 이릅니다.”


여산민이 그렇게 말했을 때 고풍무가 상자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용부단주에게 준 것이 아닌 다른 큰 야명주를 꺼내어 빛을 내면서 상자를 가지고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숨을 참아야 했지만, 그런 점이 고풍무에게 문제가 될 리 없었다. 고풍무는 방 안에서 꽤 오래 뭔가를 살피더니 밖으로 나와서 말했다.

이보게, 나착.”


이름이 불리자 나착이 앞으로 나섰다.

.”


당신 왕년에 중원에서 이름 날리던 포두였지. 나랑 이 방을 같이 한번 둘러보겠나? 숨 참기 어려우면 즉시 밖으로 나가도록 하게. 하지만 자네도 무공을 하니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그 말에 나착이 동의하자 두 사람은 다시 야명주를 밝힌 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고풍무가 밖으로 나와서 물었다.

어떤가?”


확실히 이상합니다.”


그렇지?”

고풍무가 말했다.

나도 어떤 위화감이 들었어. 오래 강호를 구르다 보면 사람과 주변 환경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어색한지를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그런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지. 대개 그런 경우는 누군가가 억지로 가짜 객잔을 꾸미고 나를 기다린다거나 그런 상황이었지. 그런데 지금도 그런 기분이 느껴졌어. 그런데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하겠군. 하지만 뭔가 이상해.”


나착이 그 말을 받았다.

상자 안의 보물이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아주 가져가기 좋게 말입니다. 반면에 방안은 아주 어지럽고 정돈하지 않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상자의 주인의 성격이 정말 반영되는 공간은 이런 방인데 그 방과 상자를 정리한 성격이 다릅니다.”


나착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물론 방안 정리정돈보다 보물이 중요하니 보물에만 정성을 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상자만 너무 실용적입니다. 그리고 상자가 실용적인 것에 비하면 보물을 포장한 주머니나 자루 그리고 끈은 너무 사치스럽습니다. 죄다 비단이거나 그보다 귀한 것들이죠.”


여산민이 그 말에 생각이 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말하자면 누군가 몰래 방안에 들어와 비밀 벽을 열고 보물 상자를 발견하여도 상자는 가져가기 어렵지만, 일단 상자를 열면 상자는 두고 그 안에 담긴 보물은 가져가기 쉽게 해두었다는 말인가?”


나착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을 분류하여 넣어두는데 화려한 문양의 비단을 사용한 사람이 상자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았습니다. 열고 나니 날카로운 칼날이 촘촘한 상자가 모양도 나쁘고 안에 암기와 칼이 숨어있고 그것이 작동하도록 무겁기까지 하니 누구도 가져갈 생각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도를 품고 상자를 겉멋은 없고 투박하게만 만든 것입니다. 정말 실용적인 사람이라면 보물을 분류한 주머니도 일부러 주문하여 맞춘 것이 틀림없는 저런 비단과 천 따위를 사용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 정도의 비단 주머니를 일부러 주문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실용적인 목적이라도 상자 역시 겉모습이 괜찮도록 주문했을 터이고요.”


그리고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상자를 열지도 않고 통으로 가져가기에는 너무 무겁지. 무엇보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접근해서 들고 가야 하고 말이지. 그것도 북야왕의 거처에서 환인공을 상대로 말이지.”


이 상자가 이곳 북야왕의 거처에 외부인도 드나들 수도 있었던 과거부터 있었다 치면, 염려할 것은 상자를 통으로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몰래 열어서 안에 담긴 물건을 가져가는 일을 염려하는 편이 현명합니다.”


나착의 말에 용미가 끼어들었다.


그리고 제가 살펴보니 무공이 깊다면 상자를 강제로 열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열쇠가 없으면 칼날과 독침이 상자를 강제로 여는 순간 발사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만, 뒤집어 이야기하면 이 상자를 내공을 사용하여 열쇠 없이 힘으로 열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 정도에 당하지 않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상자를 쉽게 운반할 수 있는 내공이나 근력을 지닌 사람도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열쇠 구멍 자체를 부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잘 정리된 보물이 역시 비싼 자루와 주머니에 들어있다면 챙길 수 있을 만큼 재물만 챙겨서 가겠지.”



고풍무가 그렇게 정리하고는 검을 들어서 상자를 내리쳤다. 금속으로 된 상자가 두 쪽이 나나 싶더니 고풍무가 중간에서 검을 멈췄다. 그리고 타기곡을 보았는데 타기곡이 그 눈짓에 따라 다가가 힘을 주어 고풍무가 갈라서 베어 놓은 부분을 더욱 벌렸다.

그러자 밑바닥에 숨겨진 한층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물체가 땅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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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허안 배상


[ 연재] 와선별부_ 타산지옥편 95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95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나려타검은 죽어있는 사혈충의 거체를 바라보았다. 환인공의 죽음은 사혈충보다 더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지만, 재가 되어 사라진 지금 그 장면을 반추하는 외에는 그것을 상기할 방법이 없었다.

사혈충의 시체는 죽어서도 여전히 그 모습이 남아 있었고, 그 엄청난 크기와 위용은 실로 눈을 떼기 어려웠다.

때문에 나려타검은 정말 간신히 시선을 타기곡과 고풍무 일행에게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사람으로 상대와 맞붙어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고풍무가 환인공에게 마지막으로 사용한 초식은 실로 경이였다. 나려타검은 그 검의 속도가 자신을 당연히 앞서고 천하제일의 쾌검을 구사한다는 제해천 신기오우의 검속에 비해서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양측을 모두 보고 마음속으로 비교한 그는 고풍무의 검속이 백에 하나도 떨어지지 않으며, 백이 아니라 기준을 천()으로 잡으면 두셋 정도 모자란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 정도면 자기 자신을 지키며 들어오는 검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누구의 내력이 먼저 소진되느냐인데 이 점에서 신기오우의 누구도 고풍무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연 세평이 말하는 그대로 무림십대검객을 검으로 누를 사람은 사철풍 이상의 검공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나려타검은 평가했다.

절대고수를 빼고 생각하면 그 정도 경지에 오른 확실한 사람은 사철풍과 화산의 구과도장 등을 합해 다섯이 되지 않는다. 천상보주나 병석에 눕기 전의 옥로전장의 노장주는 무공으로는 이길 수 있을지 모르나 검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니 예외다.

 

결과적으로 이리저리 따져볼 때 지금 고풍무는커녕 그 옆의 타기곡도 상대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들에게 없었다. 타기곡은 상부에서 내려진 평가를 상회하는, 그것도 그냥 웃도는 정도가 아니라 심각하게 추월하는 고수였다.

그리고 그 점이 그 점만 아니라면 해볼 만한 싸움일 수도 있었던 상황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이 깊은 지하에 공연히 온 꼴이 되었다.

나려타검은 말을 신중하게 고른 다음 상대의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쪽에서 필요한 것을 모두 챙긴 후에 우리도 뭔가 소득 거리가 될 것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고풍무가 타기곡과 주변 사람을 일별한 뒤에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별다른 반대는 없는 듯하군. 좋아. 뭔가 발견 못 하고 놓친다면 그건 우리 잘못이지. , 우리가 마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이면 되겠나?”

“2시진만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먼저 지나간 곳부터 저희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4시진으로 하지.”

나려타검은 별로 고민하지 않고 응낙했다.

좋습니다.”

 

 

 

북야왕의 지하궁전은 위대하고 대단하긴 했지만, 넓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지하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고, 면적을 넓히려면 암석을 파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위가 무너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니 무작정 넓히는 일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부가 무척 어두워서 더욱 그랬다. 지하니까 당연히 조명은 등을 밝힐 수밖에 없는데 이곳에 살았던 환인공은 어둠 속에서도 전혀 시야의 장애가 없으니 등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부에는 배치된 등을 켜는데 필요한 기름이나 다른 재료가 전혀 없었다. 있었어도 오래전에 소모했을 테고, 이후로는 들여올 필요도 없고 들여오지도 않았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방들은 지하의 공간을 나누거나 암벽을 파고들어서 만든 시설치고는 좋았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궁전에 어울릴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북야왕의 유지에 따라 이곳에 있던 돈이 되는 재화들은 모두 그 부하들에게 공정하게 분배되었고, 이것은 그들이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일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그런 쪽으로 는 건질 것이 없었다. 마찬가지 이유로 영약이나 비급 같은 것도 구할 여지가 없었다.


물론 궁전에는 서고도 있었고, 무기고와 다른 창고도 있었지만, 모두 평범한 책이거나 이미 비워졌거나 오래되어서 사용할 수 없거나 혹여 쓸만하더라도 굳이 그것을 들고 나갈 의미까지 부여하기는 어려운 물건들뿐이었다.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지상에 올라가서도 사막과 초원을 한참 횡단해야 하는데 큰 가치도 없는 물건을 획득하는 일은 짐을 늘리는 바보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미 말했듯이 지하궁전의 크기 자체는 큰 편이 아니어서 방은 백 개가 안 되었다. 그 대부분 방은 과거 북야왕 부하들의 거처였고, 지금은 사람도 없으니 문이 잠겨있거나 한 곳은 없었다.


고풍무와 일행은 그런 곳을 열어서 횃불을 내밀어 비춰보는 정도로 확인만 하는 식으로 진행하여서 굳게 잠겨있다거나 해서 사연 있어 보이는 공간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환인공이 남겨준 열쇠를 사용해 하나씩 열었다. 운 좋게도 처음으로 연 보고에서 곽윤아가 원하던 물건이 나왔다.


곽윤아는 혈기창(血驥槍)을 보고서 좋아서 뛰다가 바위 천장에 부딪힐까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혈기창은 실제로 붉지는 않았다. 뭐 피가 굳은 검정색과 비슷하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있었다. 창날도 무척 짧았으며 베는 용도로 쓰기에는 창날의 면적이 좁고 전반적으로 찌르기에는 적합해 보였다.


그렇게 차례로 열어보는 가운데 타기곡과 여산민이 원하던 물건이 나왔다. 그것은 노리개였는데 당연히 북야왕 왕후의 신물이었다. 이 물건이 그들의 주모인 강인혜에게 전달되기 전까지는 그들의 사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이렇게 획득함으로써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용부단주가 옥로전장을 대표하여 찾던 물건도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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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분량이 짧아 송구합니다.


허안 배상


와선별부 연재에 대하여

일단은 여러모로 연재처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어떠한 연재처를 찾지 못하여도 이곳에서 그간 올리던 타산지옥편은 종반부만 남았으니 마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 경우 그간 소수라도 몇 권씩 와선별부 1-9권까지의 판매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그분들이 중간 부분의 연재를 

못보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 그 부분을 읽으셨던 분들도 다시 보고 싶으실 때 방법이 없기도 하고요

하지만 일단 마지막회까지 따라오셨던 50분 정도의 독자를 위해서 그래도 일단 타산지옥 편은 마무리하겠습니다.

중간을 놓치신 분들을 위해 그간 분량 전체를 여기 게재하는 것도 생각해 보았으나 차후 출판이나 연재처를 찾았을 때 조건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어서 그 점은 고려 끝에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타산지옥편을 마치면 더 적극적으로 연재처를 (그 사이에도 하겠습니다만) 찾아보고,

그 결과 연재처를 얻으면 그곳에 하고, 정말 못 구한다면, 다른 연재편도 독자분들을 위해서 이곳이든 자비 사이트든 운영해서

연재하여 독자님에 대한 작가의 의무를 가능한 한, 다하겠습니다.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타산지옥 연재는 다음 토요일부터 당분간 이곳에서 재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연재를 건너 뛰어 죄송하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리면서, 다음 주 토요일부터 연재 재개를 약속드립니다.

이번 주간에 다행히 한글날이 있어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두 편 연재도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이 점은 확약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


허안 배상 

강호 사이트 폐쇄 잡담

역시 알릴 곳이 없어서 이 블로그에 적습니다.

긴 세월 유지해왔던 강호사이트를 폐쇄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적으려 했으나 일단 차후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면 하기로 하고 일단은 사정상 사이트가 폐쇄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간 방문해주신 그리고 사이트에서 제 작품을 읽어주진 분들에게 모두 감사드립니다.

제 작품의 연재처는 방법을 모색하여 뭔가 변화가 생기면 이 블로그에 다시 포스트를 남기겠습니다.




허안 배상

와선별부 임시 연재_93편 (91과 92편 포함)

타산지옥(他山之玉)

 

11권 제 93

- 앞부분에 9192편이 함께 있습니다.

 

 

설자(楔子)

 

어느 날 다람쥐(혼유자鼲鼬子)가 엽신(獵神)에게 물었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합니까?”

주로 거짓을 행한다.”

 

어느 날 엽신이 신주일군에게 물었다.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무엇을 주의해야 합니까?”

착각하지 마라.”

혹자는 이 말이 엽신에게 주는 꾸중이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 이한서(李瀚瑞). 강호사설(江湖辭說) 중에서-

 

 

 

 

 

 

고풍무는 다가오는 환인공을 한 번 흘끗 보고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초양서에게 말을 걸었다. 고풍무는 아직도 혈죽으로 만들어진 죽마 다리를 발에 차고 있었기 때문에 거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지간한 일로 죽지 않는 것은 사방이 물 천지인 지금 상황에서는 너도 마찬가지다. 환인공이 사혈출에게 죽을 염려가 없었던 것처럼 너도 어지간해서는 환인공에게 죽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에 두려움을 없애라.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마지막 힘을 쏟아내라. 오늘 몇 번이나 죽다 살았으니 지금 네 공력은 이미 강호에서 이류급 고수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초식이나 싸움의 경험은 그 정도는 안 되지만 상관없다. 네가 할 일은 최선을 다하다가 여차하면 힘을 쓰고 드러누우면 뒤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 다만 한 가지...”

여기서부터는 환인공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하였고, 어차피 환인공의 지금 공력으로는 멀어도 다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음으로 전달하였다.

[네가 죽음의 문턱에서 혼절한 상태에서 무슨 일이 네 안에서 일어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런데 어쩌면 이번에는 이전에 물에 닿아 살아날 때와는 다른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 네 자신을 붙잡아야 한다. 너를 믿는 타기곡 노형과 우리를 기억해야 한다. 알겠느냐?]

초양서는 정확히 모든 내용을 알지는 못하여도 일단 알겠다고 말하였고, 환인공은 그 사이에 그들 앞에 와서 섰다. 환인공은 혈죽으로 만든 다리를 찬 덕분에 높은 곳에 있는 고풍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둥실 떠올랐다. 덕분에 초양서는 두 사람 모두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고풍무는 품 안에서 자기병을 세 개 꺼내더니 그중 하나를 깨서 자기 검날에 발랐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바로 좌측 아래에 붙어 서 있는 초양서를 향해 던졌다. 두 개의 자기병은 정말 적절한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초양서에게 맞는 순간 깨졌으나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초양서와 머리와 목은 자기병에 직격당했기 때문에 온통 거기서 나온 액체로 범벅이 되었고, 액체의 양은 상당히 많아서 옷 사이로 가슴 언저리까지 흘러내렸다. 옷이 흡수하는 양이 없었다면, 일부 액체의 물줄기는 배꼽까지도 닿을 양이었다.

초양서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닦으려다가 고풍무가 하지 말라고 하자 손을 멈췄다. 환인공은 자신감에 차서 그들이 하는 짓을 내버려 두다가 마지막에 고풍무가 자기병을 자기 무기에 바르고 던지자 그제야 조금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자기병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치 고풍무가 그렇게 한 합리성은 안다지만 그게 쓸모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결의 시작은 아무 말 없이 고풍무의 일격으로 시작되었다. 고풍무가 왼발을 들어 발차기를 시도했는데 달고 있는 죽각의 길이가 있으니 그것은 엄청난 반경을 공세 범위 아래에 두는 돌려차기가 되었다. 따라서 공중에 떠 있어도 환인공의 면전에 그 공격이 날아들었다. 환인공은 우습다는 듯이 가벼운 손짓으로 오른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러나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손칼로 잘라내려 했던 예상과 달리 혈죽의 강도는 예상을 웃돌았다. 환인공은 그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상황이 그렇게 되자 막기는 막았어도 반보 정도 옆으로 밀렸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고풍무의 다른 쪽 대나무 다리가 그를 노리고 찔러오고 있었다. 환인공은 이번에야말로 파죽지세를 보여주겠다는 마음을 먹고 찔러오는 대나무를 막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대로 손날을 내질렀다.

대나무가 정말 파죽지세로 갈라지며 앞부분은 가루가 되듯이 흩날리는 가운데 고풍무는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이 그쪽 대나무 다리를 포기하고 왼발에 묶었던 대나무마저 풀어내어 그것을 죽창 삼아 공격했다.

이 초식의 기세가 변화가 무쌍하여 환인공은 그 경로를 예측하지 못했다. 경로를 예측하지 못하니 아까처럼 힘을 쏟아낼 시점을 잡을 수가 없었고,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기보다는 피하려 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힘은 늘어났으나 그 힘을 얻은 시기가 일각도 지나지 않았기에 완전히 그 힘에 익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풍무가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초식의 변화로 상대의 나보다 강한 내공을 누르는 기술이었다.

아무튼, 그 결과로 부유하던 환인공이 아래로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초양서의 대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역시 갑자기 늘어난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초양서는 그렇게 힘이 갑자기 늘어나는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는 장점이 있었다.

초양서도 요즘 성장을 하고 경험이 늘어났기 때문에 전과 같은 멍청이가 아니어서 자신이 힘을 아꼈다가 다음에 뭔가 노리는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이 한 수에 힘을 다 쏟아냈다.

그 기세는 환인공도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응대하였다. 그래서 그 결과 초양서의 대도는 공중으로 날아갔고, 환인공의 양팔에 초양서의 몸통이 틀어 잡혔다.

환인공은 이때 무지 키와 덩치가 큰 장한이 된 몸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초양서는 어른에게 붙잡힌 어린 아이 꼴이 되어 버둥거렸고, 뭔가 하기도 전에 환인공이 입을 크게 벌려 초양서의 목을 물어뜯으려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멈췄다. 그리고는 방법을 바꿔서 양손의 손톱을 길게 자라게 했다.

초양서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로 손톱이 자라자 그것은 초양서의 몸을 꿰뚫고 상당히 박혔다. 하지만 그렇게 한 번 멈칫한 대가로 고풍무의 죽창이 다시 환인공을 노리고 들어왔다. 조금 전의 공격과는 비교할 수 없이 완벽한 공격이었지만, 불행히도 환인공은 조금 전의 환인공이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 자신에 힘에 대해서 조금 더 파악한 환인공은 한 손만으로 초양서를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을 휘둘러 고풍무의 죽창에 맞섰다. 환인공이 길게 자라난 손톱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혈죽을 그대로 뚫고 자르면서 파편으로 만들었다.

고풍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죽장검으로 이어지는 공세를 만들었다. 환인공도 감히 고풍무의 죽장검은 잘라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손톱과 검날이 부딪치는데도 손톱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쇠로 된 것인 양 챙챙 소리를 내며 고풍무의 검에 맞섰다.

그때 붙잡혀 있던 초양서는 신공을 사용해 잠력을 폭발시켰다. 환인공은 고풍무의 공격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어 초양서의 잠력을 잠시 누르지 못했지만, 덕분에 초양서는 그 손아귀에서 풀려나 땅에 떨어졌다.

환인공이 양손이 자유롭게 된 김에 고풍무에게 공세를 집중했다. 고풍무는 그러나 그 기세에 맞서지 않고 떨어지는 초양서를 걷어차서 환인공에게 보냈다.

환인공이 고풍무가 초양서를 걷어차서 자신에게 보내면서 그렇게 날라오는 초양서의 몸 뒤의 궤적에 신형을 숨기자 그것을 비웃었다.

그 정도로는 환인공의 발달한 이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풍무에게는 다음 수가 있었다. 고풍무는 자기가 걷어차서 날아가는 기절한 초양서를 따라잡는 묘기를 보여준 다음 그를 다시 한번 걷어찼다. 그리고 앞에 초양서라는 걸리적거리는 물체가 없자 검을 휘둘러 환인공을 공격했다.

환인공은 그 공세를 여유 있게 방어할 수 있었지만, 방어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막아야 했다. 힘이나 내공 어쩌면 초식까지 환인공이 고풍무보다 위일 수 있었으나 강호에서 온갖 싸움을 하면서 굴러먹은 고풍무보다 경험이 많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가 누군가가 제대로 싸워 본 일은 거의 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 차이 때문에 환인공은 사태를 막을 수 없는 시점에서야 고풍무가 걷어찬 초양서가 어디로 가는지 알았다.

초양서는 환인공의 머리 위에 있는 피로 이루어진 혈구 안으로 들어갔다.

한발 물러서 그 싸움을 보고 있던 타기곡이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그렇군. 피도 물은 물이지.”
다음 순간 완벽한 구형을 유지하던 혈구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 이하 92편 연재분--------------------------

 

 

모든 힘을 발산하고 혼절하면 초양서는 항상 대나무 숲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초양서는 아버지가 같은 상황에서 보는 풍경도 이것일지 궁금하곤 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항상 비가 내렸다.

내리는 양은 항상 달라도 비가 내렸고, 비가 내리면 땅속에서 없던 죽순이 자라나고 그는 그 위에 올라타면 하늘에 닿을 수 있었다. 구름 위로 올라가 푸른 하늘을 보면 거기가 끝이고, 초양서는 항상 깨어날 수 있었다.

가장 빨리 내린 비도 보통 1각 정도는 기다려야 했고, 늦으면 언제가 될지 몰랐다. 그렇게 안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그렇게 내면세계에 있을 때의 시간 감각은 실제보다 몇 배나 느렸다.

몇 번이나 그 안에 들어갔다 깨어나면서 초양서는 그것이 대충 8배에서 10배 정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도 나와서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여 내린 결론이지 막상 그 안에 있을 때는 그것이 다른 세상이란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자각몽이 아닌 이상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기 마련이고, 현실에서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일이 꿈속에서는 당연하게 진행되고 당사자도 이해되기 마련인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초양서는 지금 다시 그런 세계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었다. 물론 곧 비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이 내면의 몽환계에 있는 초양서는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쩐지 그런 예감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아니 예감하던 비가 내렸다. 하지만 초양서는 곧 뭔가 잘못되었다는, 최소한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다. 하늘에서 내리는 것은 비록 액체는 맞았지만, 그것은 절대 물이 아니었다.

하늘의 색깔도 달랐다. 저녁노을 진 하늘의 아름다운 붉은 색이 아닌 불길한 묵염(墨焰)의 핏빛 구름이 가득 찬 하늘에서 핏빛 아니 그냥 피가 내리고 있었다.

단순히 피가 위에서 비처럼 내려도 불길한데 이 피는 사람의 몸에서 흐르는 것을 가끔 본 그런 피와도 달랐다. 이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이 아닌 것의 피였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의 피가 초양서 내면의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기존과 비슷했다.

역시 대나무가 자라기는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자라는 대나무는 혈우(血雨)를 맞고 자라서 그런지 스스로 핏빛을 머금은 혈죽이었다.

초양서는 이 세계에 여러 번 들어왔다 나갔지만, 처음으로 그 혈죽의 대나무 줄기를 타는 일에 망설임을 느꼈다.

타고 나가는 것뿐 아니라 그냥 만지는 일도 어쩐지 꺼려졌다. 그 사이에 주위에서는 혈죽의 죽순이 나타났다가 장성한 대나무가 되어서 공중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초양서를 유혹하듯이 점점 큰 혈죽이 자라고 있었다.

초양서는 그 혈죽이 아니면 자신이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저 혈죽을 이용하면 자신이 이전의 자신과는 달라진다는 사실을 예감하였다. 그 선택의 순간에서 무엇을 택해야 할지 초양서는 알 수 없었다.

그때 고풍무의 말이 떠올랐다. 항상 대나무를 보던 이 공간에서 죽검객이라는 별호를 지닌 고풍무를 한 번도 떠올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의식 속에서 신기했다.

 

고풍무가 뭐라고 했더라? 자신을 믿으라고 했던가? 본인을 믿으라고 했던가? 누가 누구를 믿어야 하지? 과연 누구를 믿기는 할 수 있는 건가?’

온갖 생각이 초양서를 만났다가 이별했다.

 

 

 

한편 밖에서는 환인공이 고풍무에게 악을 쓰고 있었다.

너 이 자식 대체 내 혈구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고풍무는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몸에 그 정도 묻힌 마늘액으로는 저 정도 혈구를 오염시킬 수는 없군요. 그래도 어느 정도 효과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점은 제가 틀렸나 봅니다. 그래도 초양서에게는 어느 정도 기대한 대로 반응하나 봅니다. 사혈충의 피는 환인공에게는 그러니까 일반인으로 말하자면 용의 내단 수준의 물건, 그만한 물건의 효과를 혼자서만 누리시면 안 된다고 봅니다. 저 청년의 신공이 그저 물과 닿는 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히 물과 상호작용하겠지요. 그러니까 그 상태에서 자신과 닿는 액체와 아무런 상호작용을 안 할 리가 없고, 상호작용을 한다면 흡수하든지 그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든지 어떤 식이든 영향을 받을 테고, 그렇다면 평범한 물이 아닌 피, 그것도 사혈충의 피라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장담하지만, 오늘 이후로 초양서의 신공은 그 아비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타기곡은 여전히 싸움의 영역 밖에 서 있었지만, 그 말을 다 들은 듯 이렇게 물었다.

처음부터 이런 일을 다 예상하고 꾸미고 있었나?”

아니 천만에 내가 무슨 제갈공명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전혀 정보가 없지는 않았네. 그렇지만 초양서는 정말 얻어걸린 일이야. 그런데 이렇게 일이 적절하게 되니 이는 정말 하늘의 안배란 생각이 들 정도야.”

그 말을 마쳤을 때 완벽한 구형을 이루었다가 초양서가 그 안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꿈틀거리던 혈구가 모양을 잃었다.

그리고 그 크기가 급속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상당한 양은 아래의 땅으로 떨어지고 있어서 누가 봐도 환인공이 그 혈구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 환인공은 잠시 당황하다가 곧 어떤 생각을 떠올리고 자신의 혈구로 접근하여 그 안에 손을 넣어 휘저었다. 그리고 마침내 초양서를 붙잡는 데 성공하자 그를 그대로 밖으로 던졌다.

초양서는 그렇게 날아가는 도중에 정신을 차리더니 공중제비를 넘어서 지하호수의 마른 부분을 골라서 가볍게 착지하였다.

일부러 그런 자리를 고른 것이나 그런 선택을 무리 없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자 그를 꽤 오래 봐온 고풍무와 타기곡은 이번에 죽다 살아난 일이 지난 여러 번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환인공은 가장 중앙에 있던 혈구의 상당량을 잃자 좌우에 있던 혈구를 끌어당겨서 셋을 하나로 만들어 합쳤다.

전체 크기는 반 이상이 날아갔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다시 혈구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타기곡이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두 번도 될까?”

환인공이 먼저 어림없다는 표정을 짓고 그 말에 부인하는 언사를 하기 전에 고풍무가 먼저 말했다.

두 번은 어렵지. 그렇지만 피 먹고 세진 사람은 이쪽에도 있으니 그것은 또 조금 전과는 다른 상황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고풍무는 초양서를 보았다. 초양서는 그 인상부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는데 외모의 변화가 없는데도 뭔가 달라져 있었다. 비록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서 있으니 사람의 인상이 다를 수 있으나 강호인으로 살아온 고풍무와 타기곡에게는 그런 점은 인상을 다르게 볼 요소가 현재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그러니 초양서의 변함없으면서 뭔가 변화한 겉모습은 그의 내면에서 달라진 뭔가를 반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 이하 93편 연재분 -------------------------

 

 

 

 

 

타기곡이 입을 열었다.

피 좀 먹었다고 외모고 내면이고 다 바뀔 정도라면 다른 무엇을 얻더라도 대단한 바가 없는 일이지.”

은근히 환인공을 우습게 만드는 말이었다. 환인공이 타기곡을 향해 말했다.

그렇게 건방지다면 너도 끼어들어도 탓하지 않겠다.”

타기곡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죽검객 고풍무가 확신한 일이니 이 싸움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일이다. 나는 그저 얼마나 빨리 끝날지 보다 어떻게 끝날지가 궁금할 뿐이다.”

고풍무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화답했다.

그럼 어떻게 끝내는지 빨리 보여주도록 하지.”

그러자 환인공도 더는 참지 못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모처럼 환인공이 선수를 취했는데 초양서가 그것을 막았다.

초양서가 잠력을 폭발시킨 후 전신이 단단해진 상태에서 물을 만나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그간의 양태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바뀌었다.

환인공을 상대로 남겨두었다가 힘을 보여줄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초양서는 바로 잠력을 끌어내며 맞섰는데 이제까지와 달리 심지어 그의 아버지와도 달리 힘을 쓰는 과정 중에도 온몸이 단단하게 강화되어 있었다.

덕분에 환인공의 날카로운 손톱들이 피부에 박혔는데 그저 일반인이 일반인을 손톱으로 할퀸 흔적만 남았다.

금속이 잘려나갈 상황에서 피부의 상처로 그치니 환인공의 놀라움이 컸고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저 괴물 피의 효용을 보았다고 하여도 그렇게 시간이 짧았는데 어떻게 자신의 몸에 저렇게 쉽게 적응할 수 있지? 본좌처럼 오랜 기간 그 생각만 했을 리도 없는데?”

이때는 아직 환인공의 양손과 거기서 나온 손톱이 초양서의 어깨에 박혀있었는데 초양서는 양손을 뻗어 자신의 어깨를 짚은 환인공의 팔목을 붙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무슨 말씀을 저는 사흘이나 천하가 혈해(血海)에 잠겨 소용돌이치는 끔찍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서 익사하지 않고 빠져나오려고, 그저 빠져나오기 위해서 그 안에 현신한 혈마의 유혹에 맞서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습니다. 절대 짧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환인공이 감히 자신의 팔목을 잡은 초양서의 손을 뿌리치려는 순간, 폭풍 같은 고함이 터져나 왔다.

선죽만참(禪竹萬懺)!”

고풍무의 이런 고함이 퍼진 순간 보통 사람은 볼 수도 없는 죽검이 공간을 갈랐다. 그리고 환인공의 양팔과 목이 공중으로 분리되어 날아올랐다.

환인공의 목은 검풍의 기세에 휘말려 공중에 떠 있다가 그 몸에서 일, 이장 떨어진 지하호수의 땅에 떨어졌고, 양팔 역시 잠시 떠올랐다가 각기 다른 장소에 낙하하였다.

 

고풍무는 땅에 떨어진 환인공의 목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강호에 나온 이래 본신 무예를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심지어 화산파 장문인이 된 만상검객 소사천을 상대할 때도 본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않고도 이겼습니다. 뭐 지금 붙으면 그런 여유는 없을 정도로 성장한 소사천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환인공이 그만큼 대단한 상대였다는 뜻이니 공경하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놀랍게도 환인공의 떨어진 머리가 그 말에 대답했다.

환인이란 말이 원래부터 자기 머리를 붙였다 뗐다 하는 마술을 보여주는 재인들을 일컫는 말임을 알고 있나? 이까짓 머리 잘린 일은 내 평생 수백 번 한 일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고풍무는 당연하다는 표정과 어조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저는 단지 저 청년이 환인공의 팔을 붙들 힘과 그 전에 펼쳐진 손톱 공격을 맞고도 절명하지 않을 그런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환인공의 수급과 사지 중 둘 정도를 처리하면 그다음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본좌의 머리와 몸이 다시 붙는 일은 본좌가 오늘과 같은 대공을 성취하기 전에도 순식간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풍무가 그 말에 답했다.

그래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아직도 마늘이 효과가 있습니다. 제 검에 잔뜩 마늘액을 발랐으니 붙이는 일에 지장이 좀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약간 지연되기를 말입니다. 그래야 이기니까요.”

환인공은 마늘액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고풍무의 말에서 뭔가 불길한 낌새를 눈치채고 급히 움직이려 했다.

환인공은 최대로 서둘러서 머리가 공중으로 저절로 날아올라 비행하다시피 하여 본체로 돌아가 달라붙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양팔은 그보다 한 박자 늦었다.

그리고 고풍무가 처음부터 노린 것은 바로 그 한순간의 지연된 박자였다. 양팔이 제자리에 없었기에 고풍무는 자신이 준비한 한 수를 실행할 수 있었다.

고풍무가 실행한 한 수로 날아오던 환인공의 두 팔은 본체에 붙지 못하고, 툭 하고 도중에 땅으로 떨어졌다.

고풍무는 환인공의 바로 정면에서 바싹 붙은 상태로 말했다. 그가 고개를 약간 올리자 이미 자리를 잡은 키가 커진 환인공의 얼굴이 보였다.

흡혈귀를 죽이는 방법은 전설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유명하고 확실한 것 세 가지를 꼽자면 이렇습니다. 하나, 머리를 벤다. , 심장에 나무로 된 말뚝을 박는다.”

고풍무가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죽장검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필요할 때 나무가 없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대나무가 풀이라는 학자도 있던데 제 생각에는 대나무도 나무는 나무거든요. 혹시 아니라면 저는 지금 무척 곤란한 상황입니다. 대나무도 나무라고 확신하고, 그것으로 손잡이와 검집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다가 지금 막 흡혈귀의 심장에 검집을 통째로 박아 넣은 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대나무가 나무가 아니면 이거 완전히 실수한 셈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고풍무는 이미 환인공의 심장에 박힌 자신의 죽장검 검집을 더 세게 밀어 넣었다.

환인공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면서 겨우 말을 뱉었다.

그거참 중요한 사실이군. 오늘날까지 나도 몰랐네. 대나무도 나무 맞는군. 그래. 확실히 효과가 있어. 백 년 묵은 흡혈귀인 내가 보증하지. 쿨럭...”

환인공의 입에서 선혈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환인공은 입으로 피를 흘리면서도 얼굴 표정은 아직 어두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가 늦었군. 본좌가 사혈충의 피를 얻기 전이라면 이 공격으로 죽었겠지만, 이젠 아니야. 한 백 년 정도 요상하면 문제없겠는데...”

고풍무가 환인공의 심장에 자신의 죽장검 검집을 박아넣은 채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셔야 합니다. 흡혈귀를 죽이는 방법은 세 가지라고 했는데 둘만 말했지 않습니까? 세 번째인 나머지 하나도 들으셔야죠.”

들을 필요가 없지. 가장 유명한 것 아닌가? 태양 빛을 받은 흡혈귀는 죽는다. 그런데 이 깊은 지하에서는 절대로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지.”

고풍무가 고소를 지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세상에는 지하로 태양을 가져오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건도 있습니다.”

그 말과 함께 고풍무가 품에서 꺼낸 야명주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야명주가 대낮처럼 아니 대낮 아니 그 이상의 폭발적인 섬광을 뿌렸다. 흡혈귀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도 눈이 부셔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차라리 화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열기는 없으나 그 밝기는 쇠를 녹이는 화염에나 비교해야 할 밝기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심지어 안대를 쓰고 있더라도 그 밝기를 못 느끼는 일은 없을 것 같은 휘 맑고 찬연한 광휘가 고풍무의 손에서 뻗어 나왔다.

환인공은 자기도 모르게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환인공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혈구가 타들어 가기 시작하더니 액체가 불에 타는 희한한 모습을 보이며, 곧 잿더미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어 환인공의 몸이 타들어 가더니 피부가 재로 변하며 흩어졌고, 곧 뼈가 드러났으나 뼈 역시 보이자마자 새카맣게 변색되더니 가장 약한 부분이 부러지면서 주저앉았다가 이어서 곧 그것도 재로 변하여 흩어졌다.

고풍무가 야명주를 꺼내 밝힌 지 촌각도 지나지 않아 환인공의 전부가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산화라도 하듯 세상에서 정확히는 이 지하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그의 심장에 박혀있던 고풍무의 죽장검 검집이 땅으로 떨어지려는데 고풍무가 어느새 다가가 그것을 받아들었다.

고풍무가 검집 안을 들여다보는데 타기곡이 다가와 물었다.

그 안에 환인공의 피를 받은 건가?”
맞아. 꽉 차게 받았지. 환인공에게는 미처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사실 다른 나무가 아닌 대나무를 택한 건 속이 비어서지. 원래 대나무는 물통으로도 쓰곤 하잖아? 이 경우에는 혈액을 담는 통으로 쓰려 했고 계획대로 한가득 채웠지.”

그 죽장검에 쓰인 대나무 보통 대나무 아니지? 그거 제막천선에 쓰인 혈죽하고 같은 것 아니야?”

왜 아니겠어? 바로 그것이지. 혈죽이 왜 귀한지 알아? 그거 키우려면 특별한 피가 필요하거든..”

타기곡의 표정은 원래부터 진지했지만, 지금은 진지하다 못해 무서운 표정으로 다음 말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작정하고 낀 건가?”

고풍무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왜 아니겠어? 하지만 내가 피해 끼친 것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려 한쪽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사람들 나온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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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트가 어서 정상화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안 배상


와선별부 연재에 관해서

아래 포스트에 적은 것 처럼 사이트 재개는 언제될지 모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은 여기다가 임시로 연재할 생각입니다.

오늘 22일 내로 다음 편을 올리고 그 때 지난 2편도 혹시 못본 분이나 참고하실 분을 위해 같이 올리겠습니다.



허안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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